Tuesday, November 11, 2014

효노산 수빙(樹氷) 같은 찬란함으로 빛나네

[해외 산행·여행 | 효노산&돗토리현] 효노산 수빙(樹氷) 같은 찬란함으로 빛나네

돗토리사구·모래예술관~효노산~미토쿠산 순례길~요괴의 거리 3박4일

↑ [월간산]효노고에로 오르는 삼나무 숲길. 이 길은 옛적 돗토리 주민들이 교토의 이세신궁으로 참배하러 다녔던 옛길이기도 하다.

여행은 여행지를 잘 엮어야 비로소 보배롭다. 스케줄을 잘못 짠 여행은 종종 고역이 된다. 그 지역 명소를 훤히 꿰고 있는 누군가가 정성들여 엮어 낸 여정이 아니면 양념 잘못한 음식처럼 괴롭기 마련이다.

일본 돗토리현 서쪽 요나고공항에서 기자 일행을 맞이한 돗토리현 관광전략과 국제교류원 배지영(29)씨는 옆의 직장 상사인 사카타 계장과 며칠 고심해 만들었다며 일정표를 내민다. 돗토리현의 4대 명산 중 가장 동쪽에 있는 효노산(1,510m)을 정점 삼은 3박4일 일정이다.

"동쪽으로 가면서 돗토리사구와 모래미술관, 우라도메 해안을 보고 나서 효노산 산중으로 들어갈 거예요. 가는 도중에 이곳 명품 사케 제조장 들르고, 나오는 길에 미토쿠산 순례길 답사하고요. 끝으로 요괴 캐릭터 도시 사카이미나토로 안내할게요."

일본의 47개 현 중에서 돗토리현(鳥取縣)은 한국을 염두에 둔 국제교류원이 5명으로 가장 많다. 대다수 현이 1명이거나 아예 없으니, 돗토리현이 얼마나 한일관계를 중시하는지 알 수 있다. 동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강원도와 돗토리현은 올해로 이미 자매결연 20주년이다. 그외 속초시와 요나고시 등, 강원도와 돗토리현은 지자체 간 자매결연 도시 수도 각 국에서 가장 많다. 이 돗토리현의 국제교류원으로 근무를 시작한 2011년부터 현내 명소들을 사흘이 멀다 하고 두루 답사해 온 배지영씨가 자신하는 일정이라니, 토를 달 이유가 없다.
바람의 언덕에 한일우호교류공원

배지영씨는 해안가 9번도로를 1시간 남짓 달려, 어느 한적한 공원 주차장에 버스를 세운다. 바람의 언덕(風の丘)이라는 두툼한 둔덕 위에 한일 우호교류공원이 조성돼 있다. 요즈음의 모랫가루 서걱이는 것 같은 한일 관계를 새롭게 돌아보게 만드는 곳이다.

한국의 배가 바람에 떠밀려 여기까지 온 것을 상징하는 돌(石)풍차와 석조 형물, 정자, 만개한 철쭉 등으로 말끔하게 다듬어진 공원 북쪽의 한국식 단청을 한 우호대(友好臺)에 서자 시원한 바닷바람과 더불어 푸른 바다풍광이 펼쳐진다. 공원 안내판엔 공원의 유래가 한글로도 씌어 있다.

'1819년 울진군 평해를 나선 상선이 폭풍에 난파, 아카사키로 표류해 왔다. 돗토리 영주는 안의기 선장을 비롯한 12명 선원을 잘 보살펴 귀국시켰다. 1963년엔 거제도 어선 성진호가 아카사키 앞바다로 표류해 왔고 선원 8명은 주민들 성금으로 도움을 받아 한 달여 머물며 선박을 수리한 뒤 귀국했다.'




↑ [월간산]1 한일우호 교류공원의 돌바람개비. 잔디와 철쭉으로 곱게 단장했다. 2 한일우호 교류공원에 세운 우호정. 바다 조망이 좋은 곳이다.

정자에 서서 한국 배가 표류해 왔던 아카사키 앞 바다를 바라보다가 북서편 저 멀리 수평선 너머 어딘가에 있을 강원도를 향해 아슴하니 실눈을 떠본다. 상대 국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각각 80%, 70%나 된다니,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돗토리현은 강원도처럼 바다를 길게 끼고 있되, 동서로 누웠다. 동부 최고의 산과 도시는 효노산(1,509m)과 사구(砂丘)로 유명한 돗토리시, 서부는 다이센산(大山·1,711mm)과 요괴 캐릭터로 이름난 사카이미나토시다. 돗토리현에서 가장 높은 산 다이센은 조망은 좋되 급경사 돌계단길로 이름 높은, 설악산처럼 급준한 산이다. 효노산은 그와 정 반대다. 옛적에 바닷속이었다가 떠오른, 평창의 고위평탄면 지대인 선자령 같은 분위기다. "등산이 아니라 걷기가 대세인 요즈음 한국의 트렌드에 딱 맞는 코스"라며 배지영씨는 효노산을 이번 취재 일정의 핵심으로 잡은 이유를 밝힌다.

강원도와 돗토리현은 겨울 적설량이 많다는 점도 비슷하다. 우리가 오를 돗토리현 동부의 고산 효노산 북사면 일대는 산인(山陰)지방, 곧 산그늘이 진 지방이라 따로 부르기도 한다. 동해를 건너온 습한 바람이 다이센산~효노산이 이루는 장벽을 넘지 못하고 엄청난 눈을 쏟아붓는 것이다.

자연으로 되돌려버리는 모래조각 걸작품들

첫날 숙소로 가기 전, 오후 햇살이 비끼는 거대 모래언덕의 멋이 각별하다며 배지영씨는 돗토리사구로 이끈다. 돗토리사구는 우라도메해안과 더불어 산인(山陰)해안국립공원을 이루는 핵심이다.

사구도 사구지만, 일행을 더 매료시킨 것은 사구 옆 모래미술관(砂の美術館)의 모래 조각품들이다. 아니, 그 모래 조각품들의 한시성(限時性)이다. 그리스 신화 속의 인물이며 대성당들을 거대하고도 정교하게 묘사한 세계 각국 유명 작가들의 그 모래 조각품들은 누천 년 보존해야 마땅할 것 같은데, 어이없게도 4월부터 1월까지 단 9개월 전시하고 모두 자연으로 되돌린다.




↑ [월간산]돗토리사구. 광막한 모래언덕과 바다가 맞붙어 있는, 독특한 조망과 체험을 선사하는 곳이다.

전시장을 돌아보고 나서 바깥 전망대에 올라선다. 대자연의 걸작품, 억겁의 세월 동안 대양의 파도와 바람이 빚어낸 돗토리사구의 광막한 풍광이 펼쳐진다. 그 거대 사구의 유혹도 대단해, 뜨거운 햇살을 감수하고 모래밭을 걷게 했다. 폭 2.4km, 길이 16km나 되는 그 사구 가운데 서면 그냥 모래둔덕이 아니라 숫제 사막이다.

첫날 휴식이 특히 중요하다며 배지영씨가 잡은 첫 숙소는 1200년 역사를 가진 온천장 이와이(岩井)의 료칸 아카시야(明石家)다. 400년 전에 지어졌으나 80년 전 화재로 소실돼 다시 지었다는 업소로, 구석구석 오랜 료칸의 멋이 풀풀 풍긴다.

이와이온천장은 돗토리현의 10여 개 온천장 중 옛 모습이 가장 여실히 남아 있는 곳이라 한다. 돗토리현은 서에서 동으로 가면서 온천수의 온도도 점차 높아지고, 맨 동쪽인 이곳 온천수온이 특히 높다고 한다.

아카시야 료칸의 하고로모(羽衣)실은 요즈음 유행하는, 이를테면 풀빌라다. 별도의 온천탕 욕조를 방문 바깥에 숲과 나무 울로 마련해 두었다. '저 중년 노땅과 이런 멋진 방을 함께 써야 하다니', 하는 장탄식이 절로 나오기는 피차매일반이다.

와카사정 옛 거리와 전통 사케 벤텐무스메

2일째, 배지영씨는 이 지역 최고의 해안 절벽 경관지인 우라도메(浦富)해안으로 이끈다. 일단 유람선을 타고, 해식동굴 속도 드나들며 탐승한 뒤 둔덕 조망대로도 올라본다. 정수리에 소나무 한 그루를 이고 밑둥은 구멍이 뚫린, 우라도메의 상징인 기암 센간 마츠시마가 옥빛 바다를 수반(水盤)삼은 명품 수석(壽石)으로 떠오른다.




↑ [월간산]1 돗토리사구 옆 모래미술관. 정교하고 거대한 모래조각품들이 감탄스럽다. 2 와카사정의 불교사찰. 옛적 부자들이 기복을 위해 지은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바닷가를 떠나, 이윽고 효노산 쪽을 향해 내륙 도로로 접어든다. 산중 숙소로 가는 도중에 들른 곳은 효노산의 서쪽 사면을 관할하고 있는 와카사정(若町)마을. 여기서 일행은 두 가지에 그만 매료되고 만다. 와카사정의 옛 거리와 전통 사케 제조장이다.

와카사정은 과거 한때 교통과 임업의 요지로 부자가 많았다고 한다. 부자들은 자기들 저택 근처에 창고와 더불어 오랜 안녕을 부처로부터 보장받고자 사찰도 지었다. 지금의 골목길 풍정은 옛 분위기와 크게 다를 바 없다고 한다. 와카사정 가운데를 꿰고 있는 주도로 북쪽 뒤의 창고길 장통로(藏通路)로 접어들면 오기시마(大木島) 저택을 비롯해 그 저택만 하거나 좀 작기도 한 일련종, 정토진종 등의 사찰들, 그리고 오랜 창고건물들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서 오랜 정적을 담아내고 있다.

인구가 4,000명이 채 안 된다더니, 와카사정의 주도로로 나서도 사람 보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주도로변의 집들 처마는 폭이 1.2m로 길게 이어져 있다. 이는 폭설이 내렸을 때 이웃집간 사람의 통행이 가능케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마치 옛 일본 영화 세트장을 차려놓은 듯한 분위기의 거리 서쪽 편에는 돗토리현에서도 특히 유명하다는 사케인 '벤텐무스메(辨天娘)'를 생산해 내는 오타(太田)제조장이 있다. 여기에 들러 술 종류별로 한 잔씩 시음하다 보니 그만 불콰한 취기가 몸을 휘감는다. 시중보다 엄청 싸다기에 명품 사케를 한 병씩 사들고 다시 버스에 오른다.

효노산 여름 개산제 횃불놀이

오늘 숙소는 효노산 중턱 해발 800m 고지대에 위치한 효타쿤이란 이름의, 현대식 외양을 갖춘 와카사정 직영 숙박시설이다. 다다미가 깔려 있고 온천욕 시설도 갖춰져 있지만, 아무래도 단체 손님을 많이 받다 보니 영락없는 한국의 유스호스텔 분위기다. 다만 대형 유리창 밖으로 효노산 자락의 숲 짙은 능선과 계곡 풍광이 펼쳐져 오래도록 앉아 있을 만하다. 창밖에 보이는 계단식 논은 '일본의 계단식 논 100선'에 포함돼 있다고 한다.




↑ [월간산]1 효노산 중턱의 광장을 출발한 등산객들. 뒤에 보이는 긴 건물은 온천장을 갖춘 숙소인 효타쿤이다. 2 스키슬로프를 지나는 하산로. 주위 삼나무 숲으로 아름답다.

저녁때가 되자 배지영씨는 일행을 모두 불러낸다. 오늘 5월 31일은 효노산의 여름 개산제(開山祭) 횃불놀이 행사날. 배지영씨는 용의주도하게 이 날짜에 맞추어 일행을 부른 것이다. 참석자들이 저마다 횃불을 하나씩 치켜든 가운데 와카사정 고바야시 정장이 축사에 이어 효노산 여름산 개산을 선언했다. 이어 사람들은 안내에 따라 약 30분간 효타쿤 주변 찻길을 빙 도는 것으로 행사를 끝냈다. 이러한 개산 행사는 일본의 여러 유명한 산에서 해마다 치러진다.

효노산(氷ノ山)이란 그대로 이해하면 얼음의 산이 된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아마테라스신(天照大神)이 이 산에서 하루를 묵고 아침 햇살이 나뭇가지에 빛나고 있는 것을 보고 '히에다산(日枝ノ山)'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메이지 시대에 '효노산'이 되었는데 서일본에서 드문, 수빙(樹氷)을 볼 수 있는 산이니 이름이 제격이라 하겠다. 겨울은 눈이 너무 많아 입산이 불가하고, 3월부터 11월까지가 등산 시즌이다. 효타쿤 위 효노산박물관 건물에서 효노산 소개 영상을 보니 활엽수림의 단풍색이 삼나무숲의 진녹색과 어울린 가을 풍치 또한 기막히다.

6월 1일, 초여름 아침 햇살이 찬란한 효타쿤 위 공터에 많은 일본인들이 몰려와 있다. 오늘 산행으로 비로소 효노산 여름 산행시즌이 개막되는 것이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가로지르기도 하며 통나무 방갈로촌을 지나서 야영장 텐트촌 위에서 이윽고 숲속 길로 접어든다(GRS 좌표 N35˚21´31˝E134˚ 29´ 44˝). 안내자가 없다면 이 등산로 초입을 찾기가 좀 까다로울 것 같다. 한국인 등산객들을 위해 일본말과 더불어 한글 안내문도 쓰인 푯말들을 작년에 설치해 두었다.

일본의 어느 산을 가도 만나게 되는 삼나무숲 길이 한동안 이어진다. 삼나무 같은 침엽수는 내뿜는 피톤치드 양도 많다니 등산꾼들로선 별로 마다할 이유가 없지만 일본인들은 넌더리를 낸다고 한다. 일단 봄철 꽃가루 알러지 문제가 심각하고, 목재가 별달리 쓸모도 없기 때문이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산림녹화를 위해 삼나무를 대대적으로 심었다.

갈색의 굵은 삼나무들 중 어떤 것은 밑둥이 기슭 쪽으로 둥글게 활처럼 휘어 있다. 워낙 많은 적설에 매년 겨울 시달리며 이렇게 굽으며 자란 것이다. 산길은 숲 짙고 경사가 완만해 어린아이들도 줄지어 오른다.




↑ [월간산]1, 2 효노산 중턱의 캠프장과 통나무 방갈로. 3 효노산길의 오아시스 너도밤나무숲. 4 효노산릉의 전망대. 주위 산죽의 바다가 조망된다.

효노산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일본 최대의 조류인 검둥수리와 멸종위기종인 반달가슴곰, 멧돼지, 일본사슴 등의 대형 포유류가 서식하고 있다. 특히 곰은 위험해, 대다수 일본인은 배낭에 딸랑거리는 작은 종을 매달고 산행한다. 오늘처럼 많은 이가 줄지어 오르는 날은 저 숲속 어딘가 가만히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삼나무, 너도밤나무, 섬조릿대의 산

해발 1,030m 지점의 작은 계류에서 오늘 효노산 산행 가이드를 담당한 자연보호감시원 다나카(田中)씨는 걸음을 멈추고 "저 위 능선과 단 200mm의 표고차가 있을 뿐임에도 이렇듯 풍부한 물이 갈수기에도 흐르는 것은 너도밤나무숲 덕분"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너도밤나무숲에 대한 일본인들의 사랑은 각별해, '어머니의 숲'이라 부른다. 이 나무는 뿌리가 넓게 퍼져 토사 붕괴를 막고 풍부한 낙엽은 수분을 축적하는 천연 댐의 역할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남벌로 많이 사라졌지만 효노산엔 300ha 정도 남아 있고, 이 숲은 서일본을 대표하는 너도밤나무 숲으로 꼽힌다.

길엔 간혹 돌계단이 깔려 있기도 하다. 이 돌계단은 1800년대 중반 메이지(明治)시대에 깔린 것이지만 그 훨씬 전부터 이 효노고에(고개) 길은 돗토리에서 와카사정을 거쳐 교토 방면으로 가는 유일한 공식 루트인 '이세마치길'이었다. 와카사정에서 부자들이 여럿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이 길에 힘입어서였다. 에도시대(1603~1867년) 이 지역 서민들끼리 여비를 마련, 미에현 이세시의 이세신궁이나 교토부의 오에초에 있는 본래의 이세신궁까지 참배하러 가는 풍습이 유행, 많은 사람들이 이 고갯길을 왕래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는 한편 길 표식으로서 많은 지장보살 석상을 세웠다. 해발 1,255m 효노고에 고갯마루에 오르자 그중 하나로 1843년 세워졌다는 지장보살상이 길손을 맞는다.

고개엔 눈이 쌓이지 못하게 뾰족 지붕을 한 작은 대피소가 하나 세워져 있다. 대피소 옆 나무 그늘에 숨었다가 뙤약볕 능선길로 나섰다.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지나자 뽀얀 흙먼지가 일어난다. 저 멀리까지 평지에 가까운 평탄면이고, 눈에 보이는 곳은 거의가 산죽(섬조릿대) 군락이다. 아예 산죽의 바다다.




↑ [월간산]1 효노산 주릉을 돌고 나서 슬로프 중간의 나무그늘에서 쉬는 취재팀. 2 효노산 주릉 남쪽의 휴식처에 모여선 한·일 양국민.

이 효노산의 섬조릿대 죽순은 맛이 뛰어나며, '스즈코'라고 부른다. 어제 저녁 만찬장에서 구워 나왔던 바로 그 죽순이다. 가이드는 한 줄기 뽑아내 껍질을 벗긴 뒤 "날로 먹어도 괜찮다"며 내민다. 이 죽순 채집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아침 일찍 나와서 굵고 부드러운 것만을 골라 모아서는 곧 내려간다. 채취 후 시간이 너무 지나면 스즈코가 단단해지며 맛이 떨어지기 때문에, 빨리 내려가 삶아 두려는 것이다.

효노산이 국정공원(國定公園)임에도 불구하고 이 스즈코 채취에 비교적 관대한 것은 워낙이 섬조릿대 군락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기 때문이다. 마치 옛적 바닷속 해조류가 무성했던 때의 모습을 재현하기라도 하려는듯 효노산은 펑퍼짐한 능선 전체를 섬조릿대로 뒤덮고 있다. 효노산이 과거 바닷속이었음을 산 곳곳에서 발견되는 소라나 고둥의 화석이 증언하고 있다. 우리나라 동해안지방이 융기하면서 이곳 일본 북부해안지역도 함께 떠올랐던 것일까.

산죽의 바다 가운데는 간혹 작은 섬인양 삼나무나 너도밤나무 군락이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이 오아시스 같은 숲그늘지대 덕분에 효노산 주릉의 뙤약볕 산죽밭길은 갈 만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한증탕 이후 냉탕에 들듯 온몸을 시원히 씻어 내리는 듯한 쾌감으로 산행객을 맞이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뜨거울 한여름 산행은 아무래도 피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효노산은 가을 단풍이 특히 아름답기로 유명한 산이다.

해발 1,270m 일대의 너도밤나무 원생림 지대 숲그늘에서 아름드리 수목에 기대앉아 쉬었다가 정상을 향한다. 길은 산죽의 바다 가운데 능선을 따라 자동차라도 지날 수 있을 것 같은 폭으로 뻗어나가 있다.

산죽의 바다 저편에 뾰족한 것이 솟아오르더니, 오래지 않아 아까 본 고갯마루의 것과 흡사한 정상 대피소가 고개를 내민다. 정상 대피소는 넓어서, 우리보다 먼저 잰 걸음으로 다다른 초등학생들이 안에 들어앉아 도시락을 먹고 있다. 아무튼 여기를 정상이라 하니 정상인줄 알지, 아무 것도 없었다면 정상 찾기가 어려워 보일 정도로 효노산 정상 능선은 평평하다.

해발 1,510m 정상엔 작으나 정성들인 제단이 차려져 있다. 이를테면 시산제 지낼 준비를 해둔 셈이다. 주위에 사람이 너무 많아, 우리는 좀더 가다가 나무 그늘을 찾아 도시락을 풀기로 한다.




↑ [월간산]1 미토쿠산 삼불사의 역사를 웅변하는 삼나무 거목. 2 삼불사 법당 주변. 3 삼불사 수행로를 오르려면 등산화, 아니면 옛 짚신을 사 신어야 한다.

대피소에서 100m쯤 뚝 떨어진 곳에 지어진 목제 화장실은 2층이 휴게실 겸 전망대다. 거기에 자리잡고 도시락을 푼 사람들도 여럿이다.

능선 위에서 외따로 자라는 삼나무는 저 아래 수만 그루가 빽빽하게 밀생하는 지역의 것들과는 모습이 전혀 다르다. 전나무나 향나무처럼 사방으로 편히 가지를 뻗어, 전체적으로는 풍성하고 의젓한 외양을 갖추었다. 그런 멋쟁이 삼나무들이 모여 이룬 그늘 속에 둘러 앉아 주먹밥 도시락을 푼다. 초여름 매미가 요란스럽다.

1.5km쯤 걸어 또다른 전망대와 대피소, 화장실을 지나기까지 거의 고도가 떨어지지 않고 해발 1,400m대를 유지하더니 다시 울창한 너도밤나숲을 만나며 고개가 툭 꺾인다. 위태로울 만큼 급경사인 곳도 지나더니 앞이 트였다. 스키장 리프트 종점이다. 푸른 초원을 이룬 슬로프와 그 양옆의 삼나무 숲으로 효노산 산록은 그림엽서 속의 것 같은 아름다운 풍경을 펼쳐 보이고 있다. 그 슬로프 가운데 커다란 나무 아래 넓은 그늘에 앉아 계곡을 거슬러 오른 산들바람 맛에 취했다가 하산을 마무리했다.

초여름이어도 땀으로 범벅인데 어쩌나 했더니, 어제 묵은 숙소 효타쿤에서 투숙객에 한해 온천욕을 무료로 할 수 있게끔 슬리퍼와 비닐봉지도 제공해준다. 몸과 마음이 가뿐해진 일행은 캔맥주를 하나씩 들고 버스에 올라앉아 효노산의 강렬한 암록색 산릉과 계곡 풍광을 음미한다.

미토쿠산 순례길에서 요괴 인형의 거리로

이제 더 이상 바랄 것이 별로 없는데, 배지영씨가 아직 남았다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다"며 다음날 인도해 간 곳은 일본 명승·사적국립공원인 미토쿠산(三德山)의 산부츠지(三佛寺) 순례길. 그러나 돗토리현에서 빠트리면 안될 곳으로 강추하고 싶을 만큼 인상 깊었다.




↑ [월간산]1 삼불사 수행로 중간의 고사목에 뿌리 내린 작은 나무. 2 삼불사 윤광원의 사찰식. 화려하나 순 채식 식단이다. 3 우라도메 해안의 기암군. 4 연간 300만 명이 찾는 사카이미나토시 요괴의 거리.

미토쿠산 순례길은 지리산 실상사~문수암으로 이어가는 7사찰 길처럼 절과 암자를 이어가는 사암(寺庵) 순례길이다. 그러나 간혹은 로프를 잡아야 할 만큼 급경사 절벽길로 이어지고, 나무뿌리를 잡고 디디며 올라야 하는 곳도 있다. 실족 사망 사고도 일어났던, 노약자에겐 공포의 길이자 고난의 길이다. 그럼에도 계단을 놓지 않고 옛적 수행시대의 길을 거의 그대로 두었고, 그것이 이곳을 독특한 명소로 떠오르게 했다. 10월 말이면 맨발로 이글거리는 불꽃 위를 걸으며 원을 비는 불의 제전도 열린다.

삼불사 본당에서부터 문수당~지장당~종루당~납경당~관음당~원결괘당(元結掛堂)~부동당(不動堂)~투입당(投入堂)에 이르기까지 8당우 순례길은 왕복 약 3km의 숲길이자 바윗길이다. 여기에 들려면 입장료를 내고도 신발 검사에 합격해야 한다. 중간 검사소에서 어설픈 슬리퍼나 창이 미끄러운 신발을 신은 사람은 옛적부터 순례자들이 신었던 고유의 짚신을 사 신거나, 아니면 되돌아서야 한다.

밑둥에 금줄을 두르기도 한 엄청난 굵기의 천년 삼나무 거목들이 돌계단이나 법당 근처 여기저기 서서 분위기를 잡는다. 천태종 사찰인 삼불사는 1,300여 년 전 슈겐도(修道)의 수련장으로 창건되었다 한다. 절 주지의 아들로서 전체적인 관리를 맡고 있는 부주지 요네다(米田) 스님 말을 빌면, 예전엔 저 아래 계곡의 폭포에서 정해진 수련을 거친 후에야 입산을 허락했다.

순례길의 당우들은 절벽 동굴 아래, 혹은 높직한 절벽 위에 지지대와 더불어 세워진 목조 건물이다. 옛적 수행자라 해도 수행인지 소풍인지 헷갈리지 않았을까 싶게 오르내리는 도중에 보이는 경치가 좋다. 각 당우에서 수행자가 살고 있지는 않다.

문수당이나 지장당처럼 밑이 아찔한 절벽인 당우도 마루에 난간이 없어, 겁 많은 이는 아예 돌아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종루당에서 대앵, 하고 종을 한 번 울려본 뒤 서너 개 당우를 더 지나면 이윽고 순례길의 정점인 나게이레도불당(投入堂·투입당). 706년 이 절을 창건한 수행자 엔노오즈노()가 당우를 만든 다음 법력(法力)으로 절벽 중간의 동굴 속에 던져 올렸다는 전설이 전한다.

삼불사 순례를 마치고 육근-눈, 귀, 코, 혀, 몸, 그리고 생각(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을 청정히 한 일행은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이자 음식점 3개 중 가장 큰 윤광원(輪光院)에서 사찰식을 음미했다. 화려하고 고급스런 상차림이 사찰식이 아니라 무슨 요정 음식 같은데, 육류는 물론 파, 마늘도 전혀 쓰지 않은 채식 상차림이다. 요네다 스님의 자세한 설명과 더불어 사찰식을 포식한 일행은 이제 그만 아무 생각 없다는 표정이다.




↑ [월간산]삼불사 수행로 끝의 투입당. 도사가 당우를 지은 다음 던져 넣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하지만 배지영씨는 그냥 숙소로 가서 늘어지려는 일행을 "이러시면 오늘 저녁도 메밀 소바 곱배기로 할 거예요"라고 겁박하며 다음 장소로 인도한다. 엊그제 점심때 일행 중 몇 사람이 느닷없이 미식가연 하며 순 일본식 시골 메밀 소바를 '곱배기'로 고집했다가 입맛에 맞지 않아 억지로, 겨우 면소쿠리를 비운 바 있다.

사카이미나토시. 인구 3만4,000명의 작은 도시지만 매년 관광객 300만 명을 불러들인다. 할머니에게서 어릴 적 들었던 요괴 전설을 만화로 형상화한 이곳 출신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 덕분이다. 길이 800m의 미즈키 시게루 거리에 세운 156개의 정교한 요괴 청동상을 세운 한편 만화 속 요괴 인형을 뒤집어쓴 사람이 도시 곳곳을 어슬렁거리게 하고, 요괴 버스, 요괴 열차도 다닌다. 일본 아이들은 주인공 게게게노 기타로 인형이 나타나자 환호와 더불어 너도나도 옆에 붙어서서 기념사진을 조른다.

미즈키시게루 기념관에 들렀다가 요괴 형상 빵을 파는 제과점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받아드는 것으로 돗토리현 3박4일 일정을 마무리한다. 앞자리의 동행은 아이스크림에도 혹 요괴 형상이 들어 있는 지 유심히 살핀다. 일본은 참으로 다채로운 나라다.

돗토리현 명주 벤텐무스메

호주까지도 유명…4대째 대물림 제조

와카사정의 사케 생산처 오타(太田)제조장은 우리로 치면 옛 시골 양조장쯤 되는 분위기지만 호주 시드니에도 단골이 있을 만큼 품질 좋은 술로 이름 높다. 순하디순한 교장 선생님네 같은 인상의 오타 요시토(太田義人)씨 부부가 벌써 4대 100여 년째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 [월간산]오타씨 부부(위)와 숙성중인 술통(아래).

"이 지역 쌀과 물로 빚지요. 쌀을 짤 때 기계를 쓰지 않고 옛 방식대로 손으로 짜내지요. 시간은 들지만 그 덕에 술맛이 유지된답니다. 방법이 이렇다보니 수량을 한정적으로 낼 수밖에 없답니다."

오타씨네는 추수가 끝난 직후인 11월부터 이듬해 3월 사이에 고리키, 다마사카에 등 5종류의 쌀로 5종류의 술을 따로 빚어낸다. 부부가 안내하는 커다란 술통들은 제각각 다른 쌀의 명칭과 그 쌀을 재배한 이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이 쌀 종류에 따라 단골 그룹이 다르다고 한다.

산행길잡이

산행이라기보다는 걷기 길

효노산은 해발 1,510m이니 낮은 산은 아니지만 산행이 쉽다. 마지막 스키슬로프로 내려서는 일부 구간만 제외하면 평지에 가까운 길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스키슬로프로 올라가 효노고에고개로 하산하면 내리막길의 위험도 거의 완벽하게 피할 수 있다.

주능선 일대는 거대하고도 빽빽한 섬조릿대 군락지로, 그 가운데로 길이 나 있어서 헷갈릴 염려도 없다. 다만 정상에서 동쪽, 그리고 1464m봉에서 남동쪽으로 돗토리현과 경계가 맞닿은 효고현 쪽 갈림길이 나 있으므로 유의한다. 1464m봉 대피소 지나 화장실 겸 전망대로 가는 도중 삼거리(GRS 좌표 N35° 20´19˝E134° 30´26˝)가 그중 한곳으로, 여기서 우측 길이 원점으로 가는 길이다.




↑ [월간산]

대피소는 모두 무인대피소이므로 간식, 물 등은 넉넉히 챙겨간다. 화장실은 정상과 주릉 남쪽 1464m봉에 각각 하나씩 있다.

효타쿤 위 주차장을 출발, 다시 원점으로 되내려오기까지 거리는 약 12km에 6~7시간 잡으면 충분하다. 산행 가능 시기는 3월 말경~11월 중순. 강설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여행 & 산행 길잡이

카페리로 차 가져가 효노산 중턱서 오토캠핑도 가능

동서로 길쭉한 해안지방 돗토리현 효노산 산행 & 여행은 바다를 끼고 가다가, 간혹 산중으로 들락거리며 이어가는 방식이 된다. 현 서쪽 요나고공항을 출발, 한일우호교류공원~미토쿠산 순례길~돗토리사구· 모래예술관을 보고 이와이온천장 1박, 다음날 우라도메 해안, 와카사정 옛거리·사케 주조장 관람 후 효노산 중턱 효타쿤 1박, 다음날 효노산산행 후 요나고시 가이케온천장까지 가서 1박, 다음날 요괴의 거리 보고 귀국하는 3박4일 일정이 적절할 것 같다.

돗토리현은 일본 북부여서 항공편 이외 카페리선으로 직접 차를 가지고 갈 수도 있다는 장점이 보태어진다. 효노산 중턱 조망 좋은 곳, 그리고 9번국도변에도 오토캠핑장이 조성돼 있으므로 이런 곳을 이용하며 이동하면 비용이 한결 절약될 것이다. 캠핑장 이용료는 한국과 거의 비슷하다. 다만 선편이 일주일 1회 왕복이므로 차를 가져갔다면 일본 현지에선 단 1박2일, 혹은 꼬박 1주일 체류해야 한다. 돗토리현 한국어 홈페이지 tottori.or.kr




↑ [월간산]

교통

인천공항~요나고공항(돗토리현 서쪽) 주 3회(화·금·일요일) 아시아나항공 운항. 1시간10분 소요. 왕복 항공료 30만~40만 원.

동해항~사카이미나토항 주 1회 DBS크루즈훼리(전화 033-531-5611) 왕복 운항. 목요일 저녁 6시 동해항 출발·금요일 오전 9시 사카이미나토항 도착, 토요일 저녁 7시 사카이미나토항 출발, 일요일 9시 동해항 도착. 14시간 소요. 왕복 선박료 일반석 19만5,000원.

인터뷰_돗토리현 국제교류원 배지영씨

"한국과 일본을 서로에게 알려 주는 역할에 보람"

배지영(29)씨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 돗토리현 국제교류원까지 하게 된 한국 처녀다. 하루키에 반해 일문학을 전공했고, 2년간 4년 과정 학점을 따내면 학위를 주는 유학프로그램으로 돗토리대학 지역학과도 추가로 나왔다. 경주에서 외국인에게 문화재에 대해 설명하는 가이드가 보기 좋아서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도 취득했다니, 교류원 자격을 제대로 갖춘 셈이다.

국제교류원이 하는 일은 한국의 미디어, 여행사를 상대로 돗토리현을 홍보하는 일, 각종 교류회의 통번역, 한국 문화를 일본에 알리는 일 등이다. 돗토리현의 초등생이나 주민 상대로 한국 문화 관련 강의도 하는데, 그런 때 특히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한·일 간 민간 교류가 좀더 활발해질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정치적으로는 서로 갈등상태이지만, 민간 차원에서라도 친밀하게 지내야 나중에 진정한 이웃나라가 될 수 있잖아요. 아이들 세계에선 한류 열풍이 여전히 대단해요. 카라, 소녀시대, 동방신기는 말할 것도 없고, 요새는 인피니트, 에이핑크, 걸스데이 등이 뜨는데, 노땅 기자님은 이런 그룹 잘 모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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