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November 8, 2014

아산 외암마을, 조상의 지혜와 미감이 깃든 촌락

아산 외암마을, 조상의 지혜와 미감이 깃든 촌락


(아산=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전통마을은 대개 '살아 있는 민속 박물관'으로 일컬어진다.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과거의 풍습과
생활양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전국에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전통마을은 모두 7곳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을 비롯해 제주 성읍마을, 고성 왕곡마을, 성주 한개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이다. 마지막 하나가 바로 아산 외암마을이다.
아산 외암마을은 전통마을 가운데 수도권에서 가장 가까워 나들이객이 많이 들르는 명소다. 그런데 대부분은 사전 지식 없이 방문했다가 겉핥기로 슬쩍 둘러보고 돌아간다.
하지만 외암마을은 고궁이나 고택처럼 공부를 하고 해설을 들어야 흥미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무릇 오랫동안 존재한 장소에는 무수한 이야기가 쌓여 있는 법이다.
외암마을의 옛 명칭은 '오양골'이다. 오양골은 외양간의 충청도 방언인 '오양간'에서 비롯됐다. 인근에 마필을 공급하던 시흥역이 있었고, 마을에서 역말을 길렀기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혹자는 마을 뒤편에 솟아 있는 바위가 '외암'이어서 외암마을로 칭해졌다고 말한다.
100여 명이 거주하는 외암마을은 예안 이씨의 집성촌이었다. 본래는 다른 성씨가 살았는데, 16세기에 이사종이란 인물이 아들이 없는 부잣집의 맏사위로 들어가면서 예안 이씨가 늘었다고 한다.
이후 이사종의 5대손인 외암 이간이 터를 닦으면서 씨족 촌락이 됐다. 현재도 외암마을에는 그를 기리는 사당이 있고, 기일인 음력 3월 14일마다 후손들이 제사를 지낸다.
보통 4대조를 넘는 조상은 한날에 시제를 올리는데, 이간은 나라에서 따로 모시기를 허락해 불천위가 됐다.
◇ 외암마을 기행의 백미, 수로와 돌담
물이 없으면 마을이 들어서지 못한다. 식수와 용수는 삶의 필수 조건이다.
작은 천으로 둘러싸인 외암마을은 물이 흔하다. 심지어 마을 내에도 도랑이 흐른다. 길옆으로 너비가 아이의 보폭 정도 되는 물길이 있다. 이는 하수구가 아니라 일부러 설치한 수로다. 중요민속문화재로 정해진 마을 중에 수로가 있는 곳은 외암마을뿐이다.
외암마을의 수로는 독특하다. 물길이 가옥으로 흘러들기도 하고, 집에서 빠져나와 담 밖의 큰 수로에 합류하기도 한다. 혈관처럼 집집마다, 구석구석까지 미친다.
3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수로에는 많은 사연이 얽혀 있다. 일단 마을의 주산인 설화산(雪華山)과 관계가 있다. 굽이도는 수로의 원천은 설화산의 계곡이다.
선조들은 비록 한자는 다르지만, 설화산에 화기(火氣)가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불과 상극인 물을 마을에 끌어들였다.
실제로 마을의 수로는 방화수로 이용됐다. 동고서저의 지형인 외암마을은 북서풍이 부는 겨울이면 화재에 취약했는데, 수로는 불을 끄는 데 매우 유용했다.
수로의 또 다른 가치는 조경의 도구였다는 점이다. 외암마을에는 정원이 예쁜 집이 적지 않다. 정원에는 수목과 화초가 식재되고 연못이 만들어졌다. 연못은 수로의 물로 채워졌다. 자세히 살펴보면 수로와 연결된 못도 있다.
돌담 역시 설화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설화산은 바위가 많은 산이다. 외암마을도 지반이 흙이 아니라 돌로 이뤄져 있다. 농경지를 고르고, 집터를 닦다 보면 석재가 다량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조상들은 이 돌을 버리지 않고 담을 쌓는 데 썼다. 흙으로 안을 채우지 않고 돌만으로 담을 올렸다. 전체 길이가 5㎞가 넘는 기다란 돌담은 이러한 연유로 탄생됐다.
윗부분의 너비가 수십㎝에 이르는 돌담은 외암마을의 주된 볼거리지만, 새마을운동을 거치기 전에는 더욱 장관이었다고 한다.
© 제공: 연합뉴스
토박이 어르신들의 말에 따르면 "담 위에서 어린이들이 뛰어놀고 차가 다닐 정도"로 폭이 넓었다. 그 대신 길은 좁아서 초행자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기 일쑤였다.
돌담은 외암마을을 아름답게 해 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외암마을의 담은 방범과 경계를 위해 축조된 것이 아니다.
그 근거는 높이다. 성인이 까치발을 하면 건너편이 훤히 보인다. 사생활을 보호하고 구획을 지으려 했다면 보다 높이 쌓았을 것이다. 이처럼 적당한 높이의 돌담은 길을 따라 유려하게 뻗어 있다.
◇ 고택마다 붙은 이름의 비밀은
외암마을의 중심은 멀리서도 눈에 띄는 느티나무다. 높이가 21m, 둘레가 5.5m인 이 나무의 수령은 약 600년이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마을을 굽어보고 있었던 셈이다.
느티나무 주변은 십자형 교차로다. 길이 사방으로 나 있고, 가옥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마을에는 기와집과 초가집이 어우러져 있다. 거개의 전통마을은 와가와 초가의 구역이 나뉘어 있다. 하회마을만 해도 중심부에는 기와집, 주변부에는 초가집이 위치한다.
하지만 외암마을에서는 이러한 구분이 불가능하다. 두 가지 형태의 가옥이 무질서하면서도 조화롭게 배치돼 있다.
물론 외암마을에서도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건물은 와가다. 그런데 이곳의 택호는 다소 생경하다. 영암댁, 송화댁, 참판댁, 교수댁, 참봉댁 등 지명이나 관직명이 사용됐다.
사실 이 모든 이름은 집주인의 벼슬에서 기인했다. 영암과 송화는 영암군수와 송화군수를 지냈다는 의미이고, 교수는 성균관 교수를 뜻한다. 다만 영암댁은 주인의 당호가 붙은 건재고택이란 가호로 더 많이 불린다.
외암마을에서 가장 큰 건재고택은 충청도의 대표적인 양반 가옥으로 이간이 태어난 집이다. 문간채와 사랑채, 안채, 광채, 곳간이 있는 저택으로 하인이 머물던 초가까지 포함하면 면적이 매우 넓다.
기둥마다 주렴이 있는 멋스러운 한옥, 예술미가 두드러지는 정원이 특색이다. 하지만 문이 잠겨 있어서 내부는 들여다볼 수 없다.
다른 집들도 상황은 대동소이하다. 유명한 고택의 대문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달려 있다. 그나마 참판댁은 길손에게도 개방돼 있어 아쉬움을 달랠 수 있다.
참판댁은 구한말 규장각 직학사와 이조참판을 역임한 퇴호 이정열에게 고종이 하사한 집이다. 고종은 그를 친애해 '퇴호거사'(退湖居士)라는 사호(賜號)를 지어주기도 했다. 참판댁의 사랑채에는 영친왕이 썼다는 '퇴호거사' 편액이 걸려 있다.
참판댁 사랑채에서 눈길을 끄는 시설물은 굴뚝이다. 원래 굴뚝은 하늘을 향해 세워지지만, 참판댁은 기단에 마련돼 있다.
이는 밥을 지을 때 피어오르는 연기를 감추기 위한 장치였다. 보릿고개에 굶주리는 양민들에게 연기를 내보이지 않으려는 미안함의 발로였다.
또 사랑채 기단에는 돌확처럼 옴폭한 홈이 있다. 일종의 간이 대야로 외출하고 귀가했을 때 물을 담아 얼굴과 손을 씻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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